이 본문의 내용은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의 논문<전환의
리더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순신의 빛나는 업적과
생애는 안팎으로
끊임없이 몰아 닥치는
역경과 고난 속에서
탄생되었다. 나라의
안위가 위태롭고
백성의 삶이
고달팠으며 밖으로는
왜군과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그를 시기
질투하는 무리들의
간악한 모함이 있었다.
민족방어전이라는
절체절명의 사명을
걸머진 사활적
싸움이었지만 그
사명의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로부터
아무런 물적 인적
지원이 없었던
전쟁이었다. 중앙정부는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라는
지휘권을 인정해준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지휘권은 끊임없는
정치적 감시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가
투옥되고
백의종군하게 되는
비극의 근원이 되었다.
전시에 지방
관아는 수군에게
일정한 군량을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피난민들의 경작지
이탈과 지방 관아의
부패 등으로 군량의
징수는 여의치
않았으며, 실제로
이순신의 수군 부대는
계사년 한 해 동안
한산수영에서 극심한
식량난을 겪는다.
이 해에 이순신 휘하
수군 6천2백여
명 중 10% 달하는
6백여 명이 굶어
죽었고 나머지
병졸들도 극심한
배고픔과 질병으로
전투에 동원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순신의 전쟁
경영이란 적을
섬멸하는 전투 지휘뿐
아니라 군수, 병참,
보급, 징모,
부상자
처리에서부터 전함
제작, 화포 제작,
탄약 생산, 농경,
제렴에 이르는
전쟁의 모든 국면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의주로
달아난 피난 조정은
오히려 남해안의 수군
진영에 대해 궁중용
소비물품(종이,
훈련용 총포와 탄약)을
요구해 오는 판이었다.
이순신의 정치적 불운은 수군에
부임하기 이전, 육군 초급
지휘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이던
1590년부터 1591년
사이에 이순신에 대한
인사발령은 극심한
파행을 보인다. 이
파행은 당시 조정
대신들 간의 당쟁과
권력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순신은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직했으며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사리사욕이나 당쟁에
관심이 없었다. 권력에
아부할 줄 모르는
대쪽같이 곧은 성격의
이순신은 당시 부패한
벼슬아치들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정유년 1597년
2월에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에
대한 죄명은 첫째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
둘째 적을 쫓아
공격하지 않았으니
나라를 등진 죄, 셋째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죄에 빠뜨렸으니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이 세 가지였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시작된
원균과의 갈등과,
조선 침략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이순신을 제거하고자
했던 소서행장의 책사
요시라의 간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순신의 문책에 관련한
어전회의는 7차에 걸쳐
열렸다. 선조실록이
그 어전 회의의
대화록을 전하고 있다.
이 발언 내용을
들여다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사형에 처할 작정을
하고 나서
조정대신들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 선조는
조정대신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을
몰아오기를 은연중에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을 의심치
않는 일부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전란
중에 장수를 죽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투옥되었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권율휘하의
백의종군을 명받았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백의종군을
명받았다는 것은 당시
명분을 중시하던
엄격한
계급사회에서는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그러나 그의 일기는 자신에게
가해진 고문과 관직
사탈, 정치적
음모와 박해 등에
관해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여러 사람들이 남긴 글
속에서도 이순신은
자신이 겪은 고통과
치욕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육군 초급 장교 시절에
임지에 거듭 부임하지
못하게 되는 정치적
불운에 대해서도 그는
아무런 기록이나
발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백의종군의
길에 나서서까지 오직
침묵으로 일관했다.
원균의 대패로
조선수군이 전멸하고
오직 열세 척의 배로
삼백 척이 넘은 왜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도, 누구도
탓함 없이 묵묵히 그의
임무를 다했다.
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며
또다시 조선을
위기에서 건져낸다. 명량승첩이
알려지자 온 나라의
백성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명나라
장수들까지 너무나
놀라며 기뻐했다.
한편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왜군들은 그
분풀이로 50여
명의 군사를 풀어 아산
이순신의 본가를
습격해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한다. 다른
가족들은 인근 산으로
피해 가까스로 화를
면했으나 셋째 아들
면은 활과 칼을 들고
그들과 맞서 싸웠다.
왜적 3명을
죽이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끝내 적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이순신의
가슴에는 깊은 멍이
들었고, 계속되는
긴장과 압박으로 인해
별로 좋지 못했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칠 년간의
전쟁기간 동안 휘하
장병들과 군사들을
관리하고 이끄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이순신의 부대에도
많은 군사 범죄와 기강
해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범죄는 강도, 강간,
절도, 명령불복종,
군사물자횡령,
음주난동, 근무지
이탈, 탈영,
기밀 누설, 적전
도주, 징모부정,
간첩 행위, 유언비어
유포 등 다른 모든
군대들의 전시 범죄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을 지옥 같은
삶의 현실과 조선
수군의 비참한 역경에
직면케 했고 회피할
명분이나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임을
부하들에게
인식시키고 스스로
실천했다. 어느
전투에서든 항상 앞에
서서 진두지휘 했으며
그로 인해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총탄을 맞기도 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언제나
죽음을 마주하며
싸웠던 장수, 이순신.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 그의 생명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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